여행(Travel)이야기들/재밋는 유럽여행

오르단 암만,나는 이대로 충분히 아름다워요

향기男 피스톨金 2006. 1. 31. 16:25

 

                  요르단 암만,

 

      나는 이대로 충분히 아름다워요"

 암만의 로마 극장 앞에서 아이가 흙놀이를 하는 동안, 나는 주변을 거닌다. 때마침 얼굴만 내놓고 온통 검은 차도르를 걸친 앳된 아가씨가 중빈을 발견하고 다가온다. 아랍어로 뭐라 이야기를 하는데, 아마도 아이가 귀엽다는 뜻인 것 같다. 또 여자아이인지 남자아이인지도 묻는 것 같다.

한때는 모든 성인 남성들이 수염을 길렀고, 남자아이들은 지금도 획일적으로 짧은 머리를 고수하는 이곳에서 중빈의 덥수룩한 아줌마 파마머리는 곧잘 여자아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중빈은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는데, 그녀는 성급하게 아이의 뺨에 입을 맞추고 안아보고 싶어 한다. 그녀가 중빈을 안았을 때 사진을 찍어도 좋겠느냐고 묻자, 그녀는 괜찮다고 한 뒤 성급히 차도르를 내려 얼굴을 가린다.

 
ⓒ2006 오소희
'디카는 평등한 물건'이라는 다카하시 아유무의 말은 옳다. 나 또한 디카를 산 뒤로 여행 중 사진을 찍도록 허락해준 모든 이들에게 반드시 액정화면을 보여주며 감사를 표시하곤 한다.
 
내가 카메라를 건네자 그녀 또한 화면 속의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본다. 어떤 느낌일까? 이렇게 앳된 아가씨가 사진 속에서 온통 검게 가려진 자신의 모습을 바라본다는 것은.

잔뜩 꾸미고 셀프 카메라를 찍어대면서 끊임없이 '나', 더 정확히는 '나의 외면'으로 향하는 우리의 삶과 가려진 나의 모습만으로 영위되는 그녀들의 삶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존재하는 것일까.

오늘날 한국의 여성들은 자신을 표현하고 드러내는 데에 그 어느 때보다 여념이 없지만, 그러나 정작 그 표현과 드러냄의 행위는 표피적인 것에 머물 때가 많다.
 
더 뛰어난 화장술로 이목구비를 잘 드러내는 것과 자아의 욕구를 자연스럽게 꺼낼 수 있는 능력 사이에는 거의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는 것이다. 또한 그것이 제도적인 여권의 신장이나 자유에의 표지물처럼 작용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가린다고 해서 이들에게 자아의 욕구를 실현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들이 차도르를 착용하게 된 데에는 여성을 보호한다는 나름의 역사적인 배경이 있으며,
 
그것이 서구화된 현대 사회와 불화한다 하더라도, 실제로 아랍 내에서 그것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여성의 숫자는 극히 적은 까닭이다.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나 이상의 어떤 것을 위해 나를 덮는 행위, 그러고도 질문이나 의문을 갖지 않는 행위….

검은 차도르의 아가씨가 로마 극장을 가로질러 총총히 사라지는 동안, 나는 조금은 섬뜩하기까지 한 카메라의 액정화면 속 검은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앞 다퉈 떠오르는 그러한 질문들로 머릿속이 빈틈없이 차오르고 있었다.

 
▲ 미니버스 실내
ⓒ2006 오소희
그 질문에 대한 첫번째 대답은 예상보다 일찍 다가왔다. 조금은 지루한 도시, 암만을 예정보다 일찍 떠나 마다바로 향하는 미니버스 안에서였다.
 
마다바는 암만에서 한 시간 반 정도 떨어져 있는 소도시로, 비잔틴 시대의 모자이크가 많이 남아있어 유명해진 곳이다.

미니버스를 타자, 중빈이 맨 뒷좌석에 자리를 잡았다. 가만히 둘러보니, 남자들은 알아서 앞쪽에, 여자들은 뒤쪽에 자리를 잡는다.
 
서로 섞어 앉지 않는 것이다. 버스가 출발하고 나는 내 옆자리의 남자 아이에게 말을 건다. 아이들을 볼 때마다, 나는 언제나 말이 걸고 싶어진다.

난 마다바로 간다. 아들과 여행 중이야. 넌 어디 가니? 거기 살고 있니? 우린 한국에서 왔어. 내 아들이 네 살이야. 넌 몇 살이니? 네 이름은? 내 질문이 계속 이어지자, 소년은 당황하고, 가만히 보아하니, 그때마다 소년의 왼편에 앉은 곱디고운 아가씨가 소년의 영어를 거들고 있다.
 
그녀는 어찌나 조신한지 고개를 내 쪽으로 돌리지도 않을 뿐더러, 목소리조차 내게는 들리지 않아서 나는 한참 뒤에야 그녀가 수준 높은 영어를 구사한다는 것, 그래서 소년을 돕고 있었다는 것을 눈치 챘다.

▲ 버스에서 내다본 킹 압둘라 모스크
ⓒ2006 오소희
서로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수줍게 미소 짓는다. 우리는 소년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름도 발랄한 달랄. 만 20세. 2년제 대학을 거쳐 지금 대학원에 재학 중이라고 한다. 영어교육학을 전공으로 하고 있으며, 졸업 후에는 선생님이 될 예정이다. 옆의 두 남자아이들은 사촌들이란다. 한눈에 보아도 그녀는 또래에 비해 지적이고 섬세한 감성을 지닌 여성이다.

"이곳을 여행하시다니, 무슬림이신가요?"
"무슬림이냐고요?"

나는 내 사자머리를 가리킨다. 그녀가 웃음을 터뜨린다. 작은 공이 통통 튀며 굴러가는 듯한 소리다. 긴장이 사라진, 그 소리가 좋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자잘한 정보를 공유한 뒤 둘이 잘 통한다는 것을 금세 알아챘고, 동시에 가운데 앉은 소년을 향해 쫓아내듯 말했다.

"너 좀 저리로 가줄래?"

무슬림의 복장은 신을 향한 복종

자리를 바꿔 내 곁으로 온 달랄의 얼굴은 호기심으로 가득하다 못해 빛이 날 지경이다. 어떻게 이토록 알고 싶은 것이 많은 스무 살 젊은이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채 자신을 억제하고 있었는지 알 수가 없다. 나는 그녀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

"당신의 복장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나요?"
"신을 향한 복종입니다. 요즘 암만의 무슬림 여성들 가운데 많은 숫자가 저처럼 옷을 입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무슬림이며 신을 섬긴다고 말합니다. 제 생각에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신께서는 여자들에게 이렇게 입을 것을 명하셨고, 이것이 가장 정확하게 신의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당신은 이제 겨우 스무 살인데, 예뻐지고 싶다거나 멋을 내고 싶다는 충동이 들지는 않나요?"
"나는 이대로 충분히 만족합니다. 신께서 제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제 안에 있는 아름다움이야말로 견줄 수 없는 아름다움이란 걸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내면의 세계는 어떻게 표현하나요? 당신의 내면과 신의 말씀이 서로 상충할 때 당신은 어떻게 둘 사이를 조율하나요?"
"상충이라… 그런 일은 아직까지 없었습니다. 저는 늘 신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려 애써왔고, 그 안에서 살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하지만 신께서는 당신에게 많은 것, 이미 세계의 다른 곳에서는 오래 전부터 일반화되어 있는 것들조차도 금지하지 않나요? 이를 테면, 당신은 남자친구와 데이트를 해본 적도 없다면서요?"
"네, 없어요."

"설마 그런 것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요?"
"때가 되면… 신께서 저를 좋은 사람에게 인도해주시리라고 믿어요."

"그 사람과 결혼 전에 데이트를 할 수는 있나요?"
"네. 약혼을 한 다음에는 가능해요. 약혼을 하기 전에는 만나 보거나 이야기를 해볼 기회가 없어요. 그를 알고 있는 집안사람들을 통해 들을 뿐이죠."

"그럼, 약혼을 한 뒤에 마음에 들지 않으면 파혼이 가능한가요?"
"네, 파혼을 할 수도 있어요."

"계속 맘에 들지 않으면, 세 번이고 네 번이고 계속 파혼할 수 있나요?"

그녀는 웃음을 터뜨린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런 사람을 아직 본 적은 없어요."
"아직 본 적이 없다고요? 요르단 사람들은 대단한 인내심의 소유자들이로군요!"

▲ 달랄, 바하, 아므르
ⓒ2006 오소희
나는 농담처럼 그렇게 말했지만, 그들의 결혼제도가 그렇게 불합리하게 생각되는 것만은 아니었다. 연애기간이 얼마나 긴가 하는 것이 정말로 그렇게 중요한 문제일까? 의외로 쉽게 헤어지는 부부들 가운데에는 오랜 연애기간을 거친 커플들이 적지 않다. 그래서 우리들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말하지 않는가. 연애와 결혼은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

연애기간에 서로에 대해 낱낱이 알아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조차 결혼생활에서 또다시 상대방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게 되고 당황하게 된다. 결혼이라는 의식을 통해 상황이 바뀌고 기대되는 역할이 바뀌었기 때문이리라.
 
더구나 타인과 일상을 공유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라도 쉽지 않은 일이다. '나'의 일정 부분을 버리고 '너'의 일정 부분을 받아들이는, 배우자와 함께 하는 한 평생에 걸쳐 인내심을 요하는 작업인 까닭이다.

"그래요. 어쩌면 당신의 마음가짐이 현명한 건지도 모르겠어요. 나는 8년의 연애를 거쳐 8년째 결혼 생활을 하고 있거든요."
"와~ 그렇다면 당신 평생의 거의 반 가량을 한 사람과 보낸 것이로군요."

"그런 셈이죠. 그 길다면 긴 기간 동안 일어난 일들이 나에게 안겨준 가장 성숙한 고찰은 바로 이것이에요. 중요한 것은 '상대방이 누구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죠. '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저 사람이었다면, 혹은, 이 세상 어딘가에 있을지 모르는 그 누군가였다면' 하고 생각하는 것은 산재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더 어렵게 만들 뿐이에요. 상황을 더 어렵게 만드는 것들은 반드시 해답이 아니기 마련입니다.

오히려 정말로 중요한 것은 '나는 어떤 방식으로 사랑을 하는 사람인가'의 문제예요. 나는 어떻게 배우자를 대하고 있는가, 어떻게 그를 받아들이고 있는가, 어떻게 화해하는가와 같은 문제들 말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또 다른 누군가를 만난다고 해도 또 같은 방식으로 사랑을 하려 들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사랑을 통해 많은 것을 해결하려 듭니다. 사랑이라는 하나의 수레 속에 저마다의 성장배경과 상처와 기쁨에 대한 기억과 미래에 대한 계획까지 한데 실어 나르려 하지요. 그렇기에, 그것은 우리의 거울이에요. 내가 추한 사랑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내가 추한 사람이기 때문이고, 내가 복잡한 사랑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내가 엉켜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당신의 마음가짐… 신께서 점지해주시는 사람에게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는 그 마음이라면, 나는 당신이 그 누구와라도, 그 어떤 제도적 모순을 거친 뒤라도, 행복한 결혼생활을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요. 당신이 사랑하게 될 그 사람 또한 당신과 같은 마음가짐을 지니고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저에게도 10년 동안 혼자 키워온 사랑이 있어요"

내 이야기가 끝나자, 그녀는 한동안 지그시 나를 응시한다. 버스가 공사장 주변을 지나면서 몹시 흔들리고, 중빈이 "Mommy. look at the graders!"(엄마, 불도저 좀 봐!)라고 외치는 것에도 전혀 동요되지 않는다. 그리고 천천히, 매우 깊은 곳에서 오랫동안 잠겨 있던 것을 길어 올리듯이 말문을 연다.

"사실… 저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요. 10년이 넘도록 지켜보아온 사람이에요. 혼자 하는 사랑이지요. 지금도 나는 그 사람을 매일 보아요. 그 사람이 웃는 것, 걸어가는 것, 이야기를 하는 것…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면서, 매일매일 사랑을 키워요."

"오, 이런! 그 사람도 당신을 알고 있나요?"
"얼굴 정도는 알고 있을 지도 몰라요. 하지만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어요."

"물론, 당신이 마음을 표현한 적도 없겠군요."
"표현한 적 없어요. 그래서는 안 되죠. 그 사람이 먼저 다가온다면 모를까."

"그 사람에게는 여자 친구가 있나요?"
"없는 것 같아요. 아니, 잘 모르겠어요."

"달랄,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요?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안으로만 삭여야 했다니… 잔인한 일이에요."
"그렇다 해도 할 수 없는 일이죠. 나는 견딜 수 있어요."

"만일 당신이 이렇게 지켜만 보는 동안에 그가 다른 여자를 선택한다면요?"

뭐든 망설임 없이 대답하던 그녀는 몇 초간 말문을 닫았다.

"…가슴 아픈 일이겠지요. 그래도 받아들일 수 있을 거예요. 그것이 신의 뜻이라면."

"그것이 신의 뜻이라고 확신하나요? 신이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확신하듯이, 당신이 그를 사랑한다는 것을 확신한다면, 어떻게 하루아침에 그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다는 거죠?"
"나로서는 선택의 여지없이… 그것이 신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다급하게 다음 말을 찾는 동안, 그녀의 사촌 동생들이 그녀를 재촉한다. 내릴 곳에 다 왔다는 것이다. 버스 기사가 큰 목소리로 "내릴 거냐, 말 거냐?"는 식의 퉁명스런 질문을 하고, 그녀는 동생들과 함께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난다.

"지금 내리는 거예요? 이럴 수가… 난 당신과 더 얘기를 나누고 싶어요!"

그녀는 출입문을 향해 몇 걸음 걷다 말고, 온통 검은 옷을 걸친 늘씬한 몸을 뒤로 돌린다.

"나도 마찬가지예요. 나도 너무나 이야기를 계속하고 싶어요. 하지만 어떻게 해요?"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이 안타까운 순간에 나는 어이없게도 그녀가 아름답다고 느낀다. 뜻대로 되지 않으면 '우씨~ 이게 뭐야?'하며 안의 잡스런 것을 다 드러내는 나와는 달리, 그녀에게서는 상황에 따라 쉽게 체념하며 감정의 부산물을 드러내지 않는 우아함이 몸에 배어 있다. 마치 검은 베일을 늘어뜨린 얼음공주와도 같은 아름다움과 차가움. 10년이 넘도록 열정을 억누르면서도 신에게 감사하는 사람에게서만 가능한 자태일까?

"하지만 어떻게 해요?"

그녀는 어느새 사촌 동생들과 창밖에서 손을 흔든다. 버스가 다시 출발하고, 나도 이제 곧 내릴 것이므로 가이드북을 뒤적이며 오늘 체크인 할 곳의 위치를 보아두어야만 한다.
 
하지만 갑작스레 대화가 중단된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우리가 서로에게 한 마지막 말이 묘하게 여운을 남겨 책을 펼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그녀가 일어서기 전 나의 마지막 말은 "그렇지만…"(However…)이었고 그녀의 마지막 말은 "하지만 어떻게 해요?"(But how?)이었다.

우연히도, 그 두 마지막 말은 그녀와 내가 지금 각자 가장 절박하게 구하는 대답에 대한 질문들이었다. 나는 앞으로 한 달간 이슬람 국가들을 여행하면서, 그들의 무조건적인 믿음과 순종 이면의 무조건적이지 않은 이유들, 바로 "However" 다음에 이어질 말들을 찾고자 하는 까닭이다.
 
그 무조건적이지 않은 이유들이 내가 한국에서 영위하는 삶의 허점을 짚어주고, 그 삶의 불필요한 소란스러움과 겉돎을 덜어낼 수 있도록 도와주기를 바라는 까닭이다.

달랄에게도 "But how?"에 대한 답을 구하는 것은 시급한 일이리라. 이제 갓 스무 살인 그녀에게 체념은 보기 드문 우아함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그녀의 이십대 전부를 지배한다면 나는 그녀가 서른 살이 되었을 때 우연이라도 그녀와 마주치지 않기를 바란다. 어둡고, 암울하고, 내일이 없는 서른 살의 얼굴은 제아무리 아름다운 이목구비를 지니고 있다 해도, 보는 이에게 고통인 까닭이다.

나는 달랄이 자신만의 뛰어난 지성과 감성으로 "But how?"에 대한 대답을 스스로 찾아낼 수 있기를 기도한다. 언젠가 내게도 'But how?'에 대한 'Know-how'를 전수해주기를 바라면서.

우연이었을까? 달랄과 헤어진 그날 밤, 나는 머물고 있던 마다바 여인숙에서 이런 글귀를 발견하고 한동안 못 박힌 듯 그 앞을 떠나지 못했다.

아무것도 너를 방해하지 못하리라.
아무것도 너를 두렵게 하지 못하리라.
모든 것은 곧 지나가 버릴지니,
신만이 결코 변치 않으리라…

덧붙이는 글
지난해 10월에서 11월 사이, 아들과 함께 아랍 삼 개국을 여행하였습니다

 
오마이뉴스 2006-01-27 12:00]    
[오마이뉴스 오소희 기자]

Torna A Sorrento(돌아오라 쏘렌토로) / Giovanni Marrad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