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밋는~한국여행/재밋는 한국의 산

한라산,러셀, 내 안의 나를 찾아가는 무아의 길

향기男 피스톨金 2006. 2. 15. 21:28

 

                      한라산,

 

   러셀, 내 안의 나를 찾아가는 무아의 길

 
▲ 폭설 내린 한라산 만세동산 풍경. 멀리 보이는 것이 한라산 정상이 백록담 화구벽이다.
ⓒ2005 오희삼
근 이십여 일을 하루도 쉬지 않고 내린 눈으로 온 세상이 하얗게 변했습니다. 그야말로 눈폭탄인 셈이지요. 제주도에서 가장 눈이 많은 한라산이 온통 설국(雪國)입니다. 사방을 둘러봐도 온 세상이 흰눈으로 덮였습니다. 미처 수확을 끝내지 못한 감귤나무에도 하얀 눈이 수북이 쌓이고, 비닐 하우스마다 무거운 눈덩이의 중압감에 뼈대가 휠 지경입니다.

멀리서 농사짓는 후배는 하우스를 덮은 눈을 털어내느라 장작불도 지피고, 눈삽으로 퍼내기도 합니다. 조금만 내렸으면 좋으련만, 너무 많은 눈이 시름에 잠긴 농부들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것만 같아서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 눈으로 치장한 한라산의 구상나무.
ⓒ2005 오희삼
요즘 한라산에서도 너무 많은 눈 때문에 걱정이 태산 같습니다. 한라산으로 진입하는 횡단도로가 눈으로 들어차서 도로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입니다. 평소에는 차량으로 10여 분이면 될 거리를 1시간 이상 걸어서 출근하려니 고역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평소 통행량이 적은 한라산 횡단도로에 제설차가 투입되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걸릴 테지요. 우선은 생활의 불편을 덜어 주는 도로 먼저 제설작업을 해야 할 테니까요.

▲ 온 가지가 가득한 눈꽃.
ⓒ2005 오희삼
이렇게 온통 눈으로 뒤덮인 한라산에 고요와 정적만이 흐르고 있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 침묵에 잠기고, 흐르는 시간마저도 눈 속에 잠겨 잠시 멈추어 선 듯 싶습니다. 그 침묵의 허공을 가르는 바람소리만이 산자락을 휘감습니다. 끊길 듯 멈추었다가 긴 호흡 끝에 터져 나온 날숨처럼 바람이 파도처럼 일렁입니다.

지난 가을 낙엽을 모두 떨구어낸 겨울의 나무들은 온몸을 하얗게 분칠하고 겨울 눈을 키우며 의연히 서 있습니다. 바람의 끝자락으로 희뿌연 안개들이 설원을 휘감고 풍경의 안쪽으로 불어간 바람이 화구벽 바윗골에서 뒤채입니다(너무 흔해서 발길에 걸린다).

▲ 영주십경의 하나인 영실기암의 겨울 설화.
ⓒ2005 오희삼
하얀 눈으로 치장하고 깊은 겨울잠에 들어선 한라산은 사실 겨울만이 풍기는 멋이 있습니다. 한라산 고원의 선작지왓과 만세동산 일대의 광활한 초원이 모두 하얀 눈에 잠긴 풍경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 벌판의 구상나무들은 겨울이면 하얀 설의(雪依)을 두르고 서 있고, 검은 현무암벽은 바람과 안개와 눈이 빚어내는 하나의 조각품으로 변하지요. 이런 한라산의 겨울 풍광을 즐기기 위해 해마다 눈이 오고 나면 등산객들이 한라산으로 밀려듭니다.

▲ 윗세오름산장에 있는 구상나무. 바람과 눈과 안개가 겨울이면 조각품을 빚어낸다.
ⓒ2005 오희삼
흰 눈으로 가득한 설원을 걸어본 적 있으신지요. 내딛는 순간 허리까지 쑥 허물어져가는 지친 몸을 일으키며 눈길을 헤쳐본 적 있으신지요. 숨은 턱까지 차오르고 이마에선 굵은 땀방울이 사정없이 흘러내리고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한 발자국 옮기는 게 얼마나 힘이 드는지 겨울산의 깊은 눈길을 헤쳐나가는 것은 말 그대로 웬만한 노가다 보다 더 힘든 노동이요, 고행의 길입니다. 겨울 산행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가쁜 숨 몰아쉬며 눈길을 헤쳐나가던 아련한 기억속의 숨결과 이마에 흐르는 땀범벅이 그리울 법도 합니다.

▲ 한라산 선작지왓 벌판의 겨울 풍경. 눈이 2m 이상이나 쌓여서 등산로 표시줄이 거의 눈 속에 잠겨 있다.
ⓒ2005 오희삼
이렇게 겨울산의 설원 속으로 눈길을 헤쳐나가는 것을 '러셀(Russel)'이라 하지요. 눈이 많은 곳에 사는 '러셀'이란 미국 사람이 고안한 제설차량(러셀차)에서 빌어온 등산 용어입니다.

폭설이 내리고 등산로가 눈에 덮인 후에 처음으로 걸어가는 그 누군가가 꼭 해야 할 일입니다. 눈 덮인 산에 새로운 길을 만들어내는 일이지요. 러셀을 해서 눈길을 다져놓지 않으면, 등산로를 찾지 못해 길을 잃기도 하고 평소 10여 분 걸리는 길도 1시간 이상 걸린답니다.

그래서 러셀이 되어 있지 않은 겨울 산길은 대부분 등산할 엄두조차 낼 수 없는 것이죠. 겨울 산행 경험이 적은 이들은 겨울산이 그저 두려울 따름입니다. 그 많던 눈이 녹아야만 산행을 할 수 있다고 미리 단정해 버립니다.

▲ 겨울산에서는 누군가가 먼저 눈길을 다지며 길을 만들어 내야 하는데, 이것을 러셀이라고 한다.
ⓒ2005 오희삼
움푹 들어간 한 사람의 발자국에 따르는 이들의 발자국이 더해지고 또 뒤를 이어 다른 사람의 발자국이 디뎌질 때마다 눈길은 단단한 하나의 새로운 길이 만들어집니다. 이렇게 처음으로 설원 위에 발자국을 남기는 러셀은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힘드는 일입니다. 허리까지 빠지는 곳에서 한 걸음을 옮기는 것조차 어려운 법이지요.

그래서 러셀을 할 때는 서너 사람이 번갈아 가며 앞장을 서지요. 그래야겠지요. 앞장 서 걸어본 사람이라면 지금 앞장서서 걷는 사람의 숨소리에서 그 팽팽한 심연의 고통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러셀의 길은 외로운 길입니다.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고독의 길이지요. 뒤따르는 이들을 위해 눈을 다지며 나아가는 발걸음은 누군가를 위한 절대희생의 길입니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무아(無我)의 길입니다. 그래야 할 것입니다. 무위자연(無爲自然)과 하나 되는 길일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러셀이 주는 마음의 선물일 것입니다.

▲ 영실 등산로로 접어드는 구상나무 숲속도 온통 눈으로 덮여 있다.
ⓒ2005 오희삼
무릇 겨울산에 갈 때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 깊은 눈속을 처음으로 걸어갔던 발자국 위로 흘리고간 땀방울의 마음을 말입니다. 아득한 밤바다에 한 줄기 빛으로 항해하는 배들의 길잡이가 되는 등대지기의 마음도 그러할 것입니다. 누구도 가지 않은 설원을 걸을 땐 힘들고 지치지만 이렇게 누군가 다져놓은 눈길은 그야말로 환희의 길일 것입니다.

비탈진 곳에선 엉덩썰매도 타고 나무마다 열매처럼 주렁주렁 매달린 설화를 배경으로 사진도 찍고, 함께 간 벗들의 환한 웃음꽃 핀 얼굴을 마주대하고 있으면 정말이지 세상의 근심은 모두 사라지고 가슴속에 무엇인가 꽉 들어차는 충만감이 들지요. 보온병에 담아온 모락모락 연기 피어나는 따뜻한 한잔의 커피맛은 또 얼마나 향기로운지, 이런 것이 겨울산행의 매력이 아닐런지요. 그럴 것입니다. 계절마다 산에 오르는 기분이 다르겠지만 유독 겨울산에서 느껴지는 색다른 시공(時空)의 감흥은 다른 계절에서는 좀처럼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 설화로 가득한 겨울 한라산은 온통 은빛 물결로 출렁거린다.
ⓒ2005 오희삼
겨울이 깊어갑니다. 바다는 사람을 들끓게 하고 산은 사람을 가라앉힌다지요.
순결한 눈으로 가득 덮인 설원 위로 나의 발자국을 찍으며 걷는 길. 그것은 마음속 깊은 곳 고요한 방에 숨어있을 나를 찾아가는 길고도 먼 길일 것입니다. 어쩌면 겨울이 내안의 나를 찾아가는 여정에 던져준 탑승권이 아닐런지요. 나를 찾아서 오늘도 진눈깨비 날리는 겨울산을 걸어갑니다.

▲ 흰 눈으로 덮인 '기다리는 여인'상. 영실등산로 1600고지 벼랑에 있는 바위에 흰 눈이 쌓여 흰 소복을 입은 여인을 떠올리게 한다.
ⓒ2005 오희삼


[오마이뉴스 2005-12-26 10:00]    
[오마이뉴스 오희삼 기자]
 
 
 
덧붙이는 글
12월 여행 이벤트 '눈꽃 여행기' 응모.

제주의 인터넷신문 제주소리(jejusori.net)에도 실립니다.

 

 

***클라리넷 협주곡 A장조 K.622 아다지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