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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해발 3600m 우뚝 솟은 ‘영혼의 나라’ 작은 인간들은 온몸 던져 기도하고…

향기男 피스톨金 2006. 3. 10. 16:04

 

          티베트,해발 3600m 우뚝 솟은

 

           ‘영혼의 나라’ 작은 인간들은

 

               온몸 던져 기도하고…


조캉 사원엔 1㎞ 넘는 참배행렬
곁에는 그만큼의 걸인, 걸인들…
聖과 俗은 이리도 잇닿아 있던가
 

[조선일보]

‘티베트에서의 7년’ 자취를 따라 찾은 티베트는 환상을 충족시켜주었다. 티베트 자치구 수도 라사에 착륙하기 전, 창밖으로 키 낮은 하늘이 푸르게 펼쳐졌다.

 

대기를 유영하는 실구름은 때론 퍼지며 실크 베일처럼 대지의 나신을 가렸고, 때론 봉화처럼 솟아올라 화사한 봄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티베트인의 눈동자는 깊었다.

그러나 문제는 준비되지 못한 몸이었다. 호텔에 도착해 여장을 풀자마자 침대에 쓰러졌다. 라사는 해발 3600m의 고원 도시. 고산증이었다. 비몽사몽 헤매다 티베트력으로 섣달 그믐을 맞는 요란한 폭죽 소리에 잠을 깼다.

 

간신히 몸을 일으켜 흡사 시가전 같은 거리를 찍다가 마구잡이 폭죽에 다리를 맞아 피멍도 들었다. 격심한 두통과 끊이지 않는 구토에 고통스런 호흡. 결국 그날 새벽 증세가 극심해져 병원에 실려갔다.

 

말도 통하지 않는 인사불성 환자가 돈을 낼 수 있는지 몸부터 뒤지려 했던 의사 때문에 맘도 상했다.

6시간 응급 처치를 끝내고 포탈라궁으로 가기 위해 자전거 택시를 탔다. 한 보행자가 가로지르자 운전사가 거칠게 욕하는 것을 보면서 “아니, 티베트 사람도!”라며 놀라다가 그렇게 느끼는 스스로에 더 놀랐다. 나는 티베트에 대해 느끼고 싶은 환상만 따로 챙겨온 게 아닐까.


 

‘티베트에서의 7년’에서 수없이 등장한 포탈라궁은 라사의 상징 자체였다. 시내 한가운데에 우뚝 솟은 궁은 방문자를 위엄으로 압도했다.

 

8세기에 처음 세웠다가 18세기에 중건한 이 궁은 역대 달라이 라마가 기거하며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로 삼았던 곳이다. 고단한 육체를 기름진 영혼에 복속시키는 티베트에 와서였을까.

 

관광객이 차 타고 들어가는 뒤쪽 길 대신 현지인이 힘들게 올라가는 앞길을 택했다. 숨 쉴 때마다 찾아오는 통증만이 내 현존을 확인시키는 고행 같은 여행길에서, 몸이 아프자 오히려 스스로를 밀어붙이고 싶은 기이한 욕망이 솟았다. 이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을 견디는 법을 배우는 일일 것이다.

하인리히가 달라이 라마를 만나기 위해 올랐던 그 많은 돌 계단과 나무 계단을 하나씩 밟았다. 솟아오른 세속의 땀은 극 중에서 소년 달라이 라마가 세상을 내려다보았던 야외 테라스의 햇볕과 바람이 말리고 식혀주었다.

 

14대째인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를 떠나 인도로 망명했지만, 영혼탑을 비롯한 역대 달라이 라마의 흔적은 곳곳에 살아 있었다.

궁을 벗어난 뒤 천천히 내리막길을 걸어 포탈라 광장 쪽으로 가니 수많은 걸인들이 다가왔다. 속(俗)은 감출 수 없는 피로(疲勞)로 성(聖)의 끝에 가까스로 잇대어 있었다.

 

갖가지 전통의상으로 차려 입은 티베트인들이 광장에서 신년을 맞아 기념 촬영을 했다. 소녀들은 티베트에서도 카메라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카메라와 수첩만 챙겨넣은 배낭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광장에 도착한 후 기진맥진해져 나무벤치 위에 약한 육신을 부렸다. 졸도인 듯 오수(午睡)인 듯 1시간을 누웠다가 겨우 몸을 일으켰다.

 

강렬한 햇살에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할 때 한 소년이 다가왔다. 몇 달은 빨지 않았을 옷에 콧물을 흘려가며 그는 나무토막에 현을 스티로폼으로 고정시킨 악기를 연주했다. 일흔 살의 무표정을 지닌 일곱 살 남짓 소년을 쳐다보자 갑자기 주체할 수 없게 눈물이 쏟아졌다.

 

우리는 또 어떤 슬픈 인연의 사슬로 이 차가운 별의 한쪽 귀퉁이에서 이렇게 마주치게 됐을까. 맥락 없는 눈물을 보고도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연주를 계속하던 소년은 지폐 한 장을 꺼내주자 곧바로 떠나갔다. 따가운 햇볕과 차가운 바람이 공존하는 세상 속으로.

라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인 조캉 사원은 티베트인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성소이다. 티베트력으로 설을 맞은 2월 28일 조캉 사원 앞은 북새통을 이뤘다.

 

사원 앞 두 개의 돌 향로에서는 향초가 짙은 연기를 피워 올렸다. 티베트에서 종교는 곧 냄새이고 공기였다. 사원 주위로 늘어선 기나긴 줄 뒤에 선 이방인은 2시간 넘게 기다리는 동안 끝없이 시달렸다. 길고 긴 순례 행렬에서 거칠게 등 떠밀릴 때마다 짜증나고 새치기 당할 때마다 기분 상했던 나는 어쩔 수 없이 부박한 ‘문명인’이었다.

조캉 사원 주위엔 참배자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이 구걸을 했다. 예상과 달리 돈을 주는 사람들은 관광객이 아니었다. 참배객은 적은 금액이라도 너나 없이 그들에게 지폐를 줬고 걸인들은 당당히 받았다. 그 자체로 예배 의식의 일부 같았다.


 


마침내 사원에 들어서자 온 정성을 다해 오체투지(五體投地)를 하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몸의 다섯 부위를 땅에 붙이며 절하는 오체투지의 의미는 일생에 한 번 이상 티베트인이 반드시 참배한다는 조캉 사원 앞에서 더욱 깊었다.

 

온몸을 던져 절을 올릴 때마다 몸과 손에 댄 나무판에서 사각사각 바닥 쓸리는 신령한 소음이 들렸다.

 

‘티베트에서의 7년’에서는 “티베트인은 힘들게 도달할수록 좀더 깨끗하게 정화된다고 믿는다”는 대사가 있었다. 가족끼리 업고 부축하며 이곳을 찾은 티베트인들은 사원 곳곳에 지전(紙錢)을 붙여가며 경배를 올리고 또 올렸다.

참배를 마치고 나서는 사람들 앞으로 바닥에 몸을 붙인 노곤한 육체들이 수없이 손을 뻗어왔다. 순례자들은 남은 지폐를 아낌없이 나누어줬다. 그들은 경건했다. 그리고 참담했다. 비틀대며 호텔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쓰러졌다. 그 순간만큼은 어떤 신보다 강한 수마(睡魔)가 덮쳤다. 죽음보다 깊은 잠이었다.


■■

호텔 앞 공항 택시를 기다릴 때 옆에 아가씨 셋이 서 있었다. 티베트 여행이 어땠냐고 물었더니 ‘아름답고 성스럽다’는 탄성이 반복해 쏟아졌다. 칠레에서 온 그들은 고산병으로 제대로 티베트를 보지 못했다는 내 얘기에 안타까워했다.

 

“언제 다시 티베트에 올 거냐”고 묻기에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한 명이 고산병 예방에 좋다며 이뇨제 상자를 직접 손에 쥐여줬다. “이거 처방 받아 꼭 오세요. 당신은 티베트를 반드시 다시 봐야 해요.”

취재는 부실했다. 이 여행기 역시 실패의 기록이 될 것이다. 하인리히가 7년을 머물고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던 티베트에 단지 70시간 머물렀던 나는 허우적거리기만 했을 뿐 티베트에 끝내 닿지 못했다.

 

택시로 질주할 때 내내 괴롭히던 그 모든 통증이 사라진 것을 느꼈다. 가까스로 적응된 순간 나는 티베트를 떠나야 했다. 어쩌면 사람살이의 모든 일이 그런 것인지도 몰랐다.

(라사(티베트)=이동진기자 [ djlee.chosun.com])


[조선일보 2006-03-09 06:37]    

 

 

 

 

*** 클라리넷 협주곡 A장조 K.622 아다지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