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마시는 이야기들/세계음식 이모저모

장맛이 좋아야 음식솜씨를 가름한다?

향기男 피스톨金 2006. 3. 13. 23:10

 

    장맛이 좋아야 음식솜씨를 가름한다?

 

 

 

 

 

 

 '장은 모든 맛의 으뜸이다. 그 집안의 장맛이 좋지 않으면 비록 좋은 채소나 맛있는 고기가 있어도 좋은 요리가 될 수 없다.'

영조시대 유중림(柳重臨)이 엮은 농서(農書)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에 나와 있는 말이다. 이는 장맛이 모든 음식 맛의 기본이며, 우리 민족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간장과 된장의 중요성을 이야기한 말일 것이다.

오늘 우리 집은 장 담그는 날

▲ 아내와 내가 정성을 다해 담근 장이다. 우리 집 음식 맛을 내는 데 한 몫 할 것이다.
ⓒ2006 전갑남
어제(11일)는 봄의 불청객인 황사 때문에 하루 종일 하늘이 희뿌연 모습이었다. 황사가 누그러지자 차가운 바람과 함께 꽃샘추위가 날을 세운다. 동장군이 그냥 물러서기가 서운해서일까? 봄이 오는 발목을 붙잡으려는 듯 마지막으로 훼방을 놓고 가려는가 보다.

아내는 차가운 날씨인데도 아침을 먹고 장 담그는 일을 서두른다. 주말마다 한다면서 몇 주째 미뤄왔던 일이다. 날씨를 핑계 삼아 이번 주도 그냥 넘어가지 않을까 은근히 바라는 터다.

"여보, 지금 장 담글 때 맞나?"
"그럼요. 음력 2월장도 괜찮아요. 왜요?"
"푹 쉬려던 참인데."
"맘먹은 김에 합시다. 소금물도 다 준비되었는데…."
"그럼 할 수 없지, 뭐."

장 담그는 일은 음력으로 정월 그믐께가 좋다고 한다. 시기적으로 늦지는 않지만 오늘은 무슨 수를 내서라도 끝내자고 한다. 아내가 뭔 일을 시작하면 정신이 하나도 없다. 게으름 피우기는 틀린 모양이다. 장 담그는 일이 만만치 않고, 아무래도 아내 혼자하기에는 버거울 것 같아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내 편히 쉬려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 항아리 씻어 엎어놓은 다음, 짚을 태워서 안을 소독했다.
ⓒ2006 전갑남
밖에 나와 씻어놓은 항아리를 소독하는 것으로 오늘 일은 시작이다. 항아리는 볕을 많이 쬘 수 있는 입이 넓은 것으로 큰 것, 작은 것 둘을 준비했다.

"아래 논배미에서 볏짚부터 가져오시지?"
"얼마나? 참, 메주 묶은 새끼줄이면 안 될까?"

버리려고 한 새끼줄도 요긴하다. 항아리 속에다 짚을 태워 마른 걸레로 깨끗이 닦아내었다. 항아리 소독을 잘해야 장에 벌레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을 하다 말고 아내가 뜬금없는 말을 꺼낸다. 요 며칠 술타령에 대한 잔소리이다.

"당신, 웬 술을 그렇게 마셔요? 간밤에 코를 골고 자는 데 천정이 무너지는 줄 알았어요. 거실로 피난 간 거 모르죠? 술 마시면 힘들고, 이기지도 못하는 술은 뭐 한다고 마셔요? 술이 그렇게 맛있는가?"

나는 정기 인사이동으로 환영회다, 집들이다 하여 사나흘 과음을 하였다. 아내의 잔소리가 쉽게 멈출 것 같지 않다. 일을 열심히 하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이럴 때는 대꾸를 안 하는 것도 상책이다.

▲ 처마 밑에 메달아 잘 뜬 메주를 구했다. 깨끗이 씻어 반을 갈라 준비했다.
ⓒ2006 전갑남
아내가 시키는 대로 메주를 짚수세미로 문질러 깨끗이 씻었다. 곰팡이가 밴 메주 냄새가 퀴퀴하지만 싫지만은 않다. 대나무 소쿠리에 받쳐서 물기를 말리고, 세로로 반을 갈라 조각을 내었다.

아내는 어제 큰 고무대야에 풀어놓은 소금물을 확인한다. 소금이 완전히 풀리려면 꽤 시간이 걸려야 할 성싶다. 항아리 소독하고, 메주 씻어 말려 갈라놓은 것으로 일단 장 담글 준비는 끝난 셈이다.

"손 시리지요?"
"괜찮아. 그래도 해가 나서 날이 풀린 걸."

좀 쉬는 동안 아내가 커피를 타왔다. 봄기운이 드는 툇마루에 걸터앉아 마시는 커피가 향긋하고 맛이 느껴진다.

장 담그는 솜씨는 장모님한테서...

모든 일이 그렇듯이 준비 과정이 번거롭지 막상 장 담그는 일은 간단하다. 장 담그는 것보다 콩을 삶아 메주 쑤는 일이 큰일이다. 예전 장모님은 메주만 있으면 장 담그는 것은 일도 아니라고 했다. 우리는 잘 아는 분께 메주를 미리 주문하여 사왔기 때문에 한결 수월하다.

소금은 1년 남짓 간수를 빼놓은 것을 사용하면 된다. 간장 맛은 좋은 소금이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숯과 붉은 고추도 적당히 준비하였다.

예전 장 담글 때가 되면 장모님께서는 미리 메주를 화물로 부쳐왔다. 그리고 집에 다니러 오실 때 아내와 함께 장을 담갔다. 장모님 돌아가신 뒤부터는 아내 혼자서 장을 담근다.

장모님께서 장 담글 때 들려주시던 속담이 생각난다. '말 많은 집은 장맛도 쓰다', '장 단 집에는 가도 말 단 집에는 가지 말라'는 말이 있다고 했다. 한 집안의 장맛이 주부의 음식솜씨를 가름하고, 가풍까지를 장맛으로 점칠 정도로 중요시했다고 설명해주셨다.

아내는 장모님이 일러준 장맛의 소중함을 잊지 않고 장을 담근다. 요즘 사먹는 된장, 고추장도 품질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직접 담가먹는 맛에 비교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그래 집에는 묵은 된장이 늘 남아 있다.

▲ 소금물에 달걀이 떠오르면 염도가 맞는다고 한다. 숯과 고추도 준비했다.
ⓒ2006 전갑남
점심 먹고 한참 쉬었다가 장 담그는 일을 마저 하였다. 풀어놓은 소금이 거의 녹았다. 아내는 소금물에 계란을 넣어본다. 계란이 금방 가라앉자 소금을 두어 바가지 더 넣는다. 그리고선 막대로 휘젖고 기다리니 계란이 떠올랐다. 이제 염도가 맞춰졌다고 얼굴에 미소가 떠오른다.

본격적인 장 담글 차례다. 빈 항아리 속에 켜켜이 메주를 집어넣는다. 그리고선 하얀 헝겊을 항아리 주둥이에 펼쳐놓고 고정시켜 놓는다. 소금물을 걸러내기 위해서다. 한 바가지 한 바가지 떠서 붓는 데도 정성을 들인다.

바가지로 항아리에 소금물을 가득 부으니 메주가 동동 떠오른다. 떠오르는 메주를 보며 간이 알맞게 된 것 같다고 아내가 좋아한다. 마지막으로 숯과 붉은 고추를 띄우는 것으로 장 담그는 일은 끝이다. 숯과 고추가 들어가면 장의 색깔을 곱게 내기도 하지만 방부효과와 정화작용을 위해 필요하다고 한다.

아내가 항아리 몸뚱이를 깨끗이 닦아낸다. 일을 마치고 손을 닦는 아내에게 한마디 건넸다.

"우리처럼 장 담가 먹는 집이 많지 않을 걸? 당신, 참 대단해! 우리 장모님은 정말 훌륭하신 분이야!"

내 넉살이 밉지 않은 아내도 웃는다. 칭찬해주는 데 싫어할 사람이 없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말을 받는다.

"아니, 아직 술이 덜 깬 것 아녀요? 평소 안 하던 말을 다하시네. 아무튼 고마워요!"

아내와 주고받은 덕담으로 봄날 오후가 빛나는 것 같다. 큰 항아리로 하나, 작은 항아리로 하나 가득 장을 담갔다.

음식 맛은 장맛이 결정한다!

장은 50일 이상 발효시키고, 바위 색깔의 곰팡이가 꽃처럼 피면 장맛이 좋아진다고 한다. 우리가 쏟은 정성으로 맛있는 간장이 되고, 된장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 아내는 켜켜이 메주를 항아리에 담고 소금물을 부어 정성스럽게 장을 담갔다.
ⓒ2006 전갑남
무슨 일이든지 정성이 문제이지, 어려운 일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요즘은 편리한 것만 추구하다 보니까 장 담그는 일과 같은 소중한 일을 소홀히 하는 세태이다. 우리는 재래식 장을 담그며 가슴 한편에 뿌듯한 뭐가 느껴졌다.

해거름이 되어 아내가 저녁을 짓는다. 부엌에 들어가자 구수한 토장국 냄새가 풍긴다. 아내는 시래기로 토장국을 끓이고 있는 중이다. 멸치국물에 된장을 풀고, 물에 불린 시래기를 송송 썰어 넣는다. 거기다 들깨를 갈아 넣어 완성한다. 토장국 국물이 걸쭉하다.

아내가 한 국자 떠서 간을 보란다. 텁텁한 토장국이 식욕이 돋운다. 다른 반찬이 없어도 토장국으로도 밥 한 공기가 뚝딱 비워진다. '장맛이 좋아야 음식솜씨를 가름한다'는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는 것 같다. 뜨끈한 토장국 한 그릇으로 속을 달래니 간밤에 남아 있는 숙취가 확 날아가는 느낌이다.

아내가 일요일 편히 쉬게 해야 하는데 부려먹어 미안하다고 한다. 아내의 말끝에 한마디 하였다.

"나만 일했나? 오늘 담근 장으로 맛난 음식 많이 해먹자구. 우리나라 된장에는 항암효과가 뛰어나다고 하잖아. 그러고 보면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할 사람은 나야! 내 맘 알지?"

 
[오마이뉴스 2006-03-13 09:56]    
[오마이뉴스 전갑남 기자]

 

 

 

***클라리넷 협주곡 A장조 K.622 아다지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