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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벳에 가서 흘린 눈물

향기男 피스톨金 2006. 3. 15. 11:01

 
 
             티벳에 가서 흘린 눈물
이동진      

 

 

 

 

전통 의상을 차려입은 티벳의 아이들입니다. 귀엽고 예쁘죠?

 

 

 

 이른 아침, 포탈라 궁 앞에서 오체투지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포탈라 궁 안에서 절을 하는 티벳 사람들.

 

 

 

전통 시장 거리인 바코르가 풍경.

 

 

 

제가 폭죽을 맞기 직전 찍었던 사진. 무슨 전쟁터같죠?

 

 

 

이것도 전통 시장 풍경.

 

 

 

포탈라 궁의 입구에서 마니룬을 돌리며 걸어가는 사람들.

 

 

 

 

이건 조캉 사원의 입구에서 오체투지를 하는 사람들 모습.

 

 

 

티벳에서 두 번 병원 응급실에 갔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기간에는 도저히 못 참을 때마다 위의 산소를 사서 마셨습니다. 위의 호스를 코에 넣고 조금씩 빨아들이는 방식이었죠. 그다지 효과도 없었는데 그래도 그거라도 매달릴 수 밖에 없었죠. 베개만한 크기 하나에 값은 1만3천원이었어요. -.-

 

티벳에 가서 흘린 눈물
  
이동진      

영화 티벳에서의 7년의 자취를 따라 찾은 티벳은

도착 무렵 내 환상을 충분히 충족시켜주었다.

티벳 자치구의 수도 라사에 착륙하기 전,

비행기 창문 밖으로 키 낮은 하늘이

시리도록 푸르게 펼쳐졌다.

대기를 유영하는 실구름은

때론 퍼지며 실크 베일처럼 대지의 나신을 가렸고,

때론 봉화처럼 솟아올라 화사한 봄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티벳 사람들은 눈동자가 깊었다.

 

그러나 문제는 준비되지 못한 몸이었다.

호텔에 도착해 여장을 풀자마자 침대에 쓰러졌다.

라사는 해발 3600의 고원 도시.

고산증이었다.

비몽사몽 헤매다 티베트력으로 섣달 그믐을 맞는

요란한 폭죽 소리에 잠을 깼다.

간신히 몸을 일으켜 흡사 시가전 같은 거리를 찍다가

마구잡이 폭죽에 다리를 맞아 피멍도 들었다.

격심한 두통과 끊이지 않는 구토에 고통스런 호흡.

결국 그 날 새벽 증세가 극심해져 병원에 실려갔다.

말도 통하지 않는 인사불성 환자가

돈을 낼 수 있는지 몸부터 뒤지려 했던

의사 때문에 맘도 상했다.

 

병원에서 나와 포탈라 궁으로 가기 위해 자전거 택시를 탔다.

어느 보행자가 위험하게 길을 건너자

운전사가 거칠게 욕설을 내뱉는 것을 보면서

아니, 티벳에서도!라며 놀라다가

그렇게 느끼는 스스로에 뒤이어 더 놀랐다.

도대체 티벳 사람들에 대해

난 어떤 환상을 덧씌워 왔던 걸까.

티벳에 대해 느끼고 싶었던 것에 대해

나는 이곳에 도착하기 오래 전부터

이미 밑그림을 그려왔던 게 아닐까.

 

티벳에서의 7년에서 수도 없이 나왔던 포탈라 궁은

라사의 상징 자체였다.

라사 시내 한 가운데 산자락에

홀로 우뚝 솟아 있는 포탈라 궁 앞에 서니

아래는 희고 위는 붉은 그 건물이

초라한 여행자의 존재를

신성한 위엄으로 압도해왔다.

8세기에 처음 세워졌다가 18세기에 중건한 이 궁은

역대 달라이 라마가 기거하며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로 삼았던 곳이다.

 

고단한 육체를 기름진 영혼에

기꺼이 복속시키는 티벳에 와서였을까.

관광객들이 차를 타고 쉽게 들어가는 뒤쪽 길 대신에

현지인들이 힘들게 올라가는 앞쪽 길을 택했다.

말 통하는 사람 하나 없는 상태에서

숨 쉴 때마다 느껴지는 고통만이

내 현존을 확인시키는 고행 같은 여행길에서,

몸이 아프자 오히려 더욱 스스로를

밀어붙이고 싶은 기이한 욕망이 솟았다.

이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시간을 견디는 법을 배우는 일일 것이다.

 

포탈라에 이르는 길은

끊임없이 계단을 오르는 일이었다.

하인리히가 소년 달라이 라마를 만나기 위해 올랐던

그 많은 돌 계단과 나무 계단을 천천히 하나씩 밟았다.

야외든 실내든 계단은 좁고 가팔랐다.

솟아오른 세속의 땀은

극중 어린 달라이 라마가 망원경으로

세상을 내려다보았던 야외 테라스의

신령한 햇볕과 바람이 말리고 식혀주었다.

 

포탈라 궁 곳곳엔 오래 묵은 세월의 냄새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14대 달라이 라마는 중국의 탄압으로

티벳을 떠나 인도로 망명했지만,

영혼탑을 비롯한 역대 달라이 라마의 흔적들은

어느 곳에서도 생생히 살아 있었다.

 

궁을 벗어난 뒤 천천히 내리막길을 걸어

포탈라 광장 쪽으로 가니

수많은 걸인들이 다가왔다.

속(俗)은 감출 수 없는 피로(疲勞)로

성(聖)의 끝에 잇대어 있었다.

 

갖가지 전통의상으로 차려 입은 티벳인들이

광장에서 신년을 맞아 기념 촬영을 했다.

소녀들은 티벳에서도 카메라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카메라와 수첩만 챙겨넣은 배낭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광장에 도착한 후 기진맥진해져

눈에 들어오는 나무 벤치 위에 약한 육신을 부렸다.

졸도인 듯 오수(午睡)인 듯

1시간을 누워 있다가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강렬한 햇살에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할 때

한 소년이 다가왔다.

몇 달은 빨지 않았을 옷에 콧물을 흘려가며

소년은 나무 막대기에 두 줄 현을

스티로폼으로 고정시킨 악기를 연주했다.

일곱살 남짓한 소년은 일흔살의 무표정으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갑자기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이 쏟아졌다.

우리는 또 어떤 슬픈 인연의 사슬로

이 차가운 별의 한쪽 귀퉁이에서

이렇게 마주치게 됐을까.

맥락 없는 눈물을 보고도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연주를 계속하던 소년은

내가 집히는대로 지폐 한 장을 꺼내주자

곧바로 떠나갔다.

따가운 햇볕과 차가운 바람이 공존하는

세상 속으로.

 

라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인 조캉 사원은

티벳인들의 신앙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는 성소이다.

지난 2월28일로 티벳력 설을 맞아

조캉 사원 앞은 티벳 곳곳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사원 앞 두 개의 돌 향로에서는

향초가 짙은 연기를 피워 올렸다.

티벳에서 종교는 곧 냄새이고 공기였다.

 

사원 주위로 늘어선 1㎞ 넘는 긴 줄 뒤에 섰다.

입장하기까지 2시간 넘게 기다리는 동안

이방인은 끊임없이 시달렸다.

길고 긴 순례의 길에서

거칠게 등 떠밀릴 때마다 짜증이 나고

새치기 당할 때마다 기분 상했던 나는

어쩔 수 없이 부박한 문명인이었다.

 

조캉 사원 주위엔

참배자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이 구걸을 했다.

중년의 어느 걸인이 들어올린 컵에

지나가던 아이가 펩시 콜라를 따라주는 모습이 보였다.

두 손으로 받은 걸인은 음복이라도 하듯

평화로운 얼굴로 콜라를 마셨다.

 

가만히 살펴보니 예상과 달리

그들에게 돈을 주는 사람들은 관광객들이 아니었다.

줄은 선 참배객들은 적은 금액이지만

너나 없이 그들에게 지폐를 줬고

걸인들은 당당히 받았다.

그 자체로 예배 의식의 일부 같았다.

 

마침내 사원에 들어서자마자

온 정성을 다해 오체투지(五體投地)를 하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몸의 다섯 부위를 땅에 붙이며 절을 한다고 해서

그렇게 불리는 오체투지는

장터와 차도를 가리지 않고 라사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티벳인이라면 일생에 한 번 이상은

반드시 참배한다는 조캉 사원 앞이라면

그 의미는 더욱 깊었다.

그들이 온 몸을 던져 절을 올릴 때마다

몸과 손에 댄 나무판에서 사각사각 바닥 쓸리는 소리는

성스러운 소음이었다.

 

티벳에서의 7년에서

티벳 사람들은 힘들게 도달할수록 좀더 깨끗하게 정화된다고 믿는다

대사가 흘러나왔던 기억이 났다.

가족끼리 업고 부축하며 이곳을 찾은 티벳인들은

이 사원의 핵심인 석가모니 금동상 앞에 이를 때까지

사원 곳곳에 지전(紙錢)을 붙여가며

경배를 올리고 또 올렸다.

 

참배를 마치고 사원 문을 나서는 사람들 앞으로

바닥에 몸을 붙인 노곤한 육체들이

수없이 손을 뻗어왔다.

여정을 마친 순례자들은

남은 지폐를 아낌없이 그들에게 나누어줬다.

그들은 경건했다.

그리고 참담했다.

 

천근만근 무거운 몸을 이끌고

호텔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쓰러졌다.

이 순간만큼은

어떤 신보다도 강한 수마(睡魔)가 덮쳤다.

죽음보다 깊은 잠이었다.

 

◆◆◆

공항으로 가기 위해 호텔 앞에서 택시를 기다릴 때

옆에 아가씨 셋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다가가 티벳 여행이 어땠냐고 물었더니

가능한 모든 감탄사와 함께

아름답고 성스럽다는 말이 반복해 쏟아졌다.

칠레에서 온 그들은 고산병 때문에

제대로 티벳을 둘러보지 못했다는 내 얘기를 듣고

너무나 안타까워했다.

 

그 중 한 사람이

언젠가 다시 티벳에 올 거냐고 묻길래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가방을 뒤져

고산병 예방에 효과가 있다는

자신의 이뇨제 상자를 내 손에 직접 쥐어주었다.

이거 처방 받아서 다음번에 꼭 오세요.

당신은 티벳을 반드시 다시 봐야 해요.

 

취재는 부실했다.

이 여행기 역시 허우적거리기만 했을 뿐

티벳에 끝내 닿지 못했던 나그네의

실패 기록이 될 것이다.

하인리히가 7년을 머물고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던 티벳에

겨우 70시간을 머물렀던 나는

결국 티벳의 깊은 속내에 눈 한 번 맞추지 못했다.

 

택시에 올라타고서 도로를 질주할 때

3일 내내 괴롭히던 그 모든 통증이 사라진 것을 느꼈다.

간신히 적응된 순간

나는 티벳을 떠나야 했다.

어쩌면 사람살이의 모든 일이 그런 것인지도 몰랐다.

 

출처; 이동진의 언제나 영화처럼 블로그       

 

 

 

*** 클라리넷 협주곡 A장조 K.622 아다지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