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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위 왕국의 비밀,레드키위

향기男 피스톨金 2006. 5. 7. 21:53

 

            키위 왕국의 비밀

 

        레드키위 방울키위 나온다

 

유전자 조작은 금지... 교배 접붙이기로만 품종 개량
 

“ 한국에서 가져온 다래도 있어요. 한번 먹어 보세요.”

지난 3월 30일 찾은 뉴질랜드 키위 생산의 중심지 테푸키에 위치한 호트연구소(Hort Research)는 세계 키위 종자 연구의 총본산이다. 앤드루 바네트(Andrew Barnett) 연구원은 “세계 각국에서 들여온 60여종의 키위 종자가 이곳에서 자라고 있다”며 방울토마토만한 다래 열매를 보여줬다. 맛을 보니 달콤했다.

 

뉴질랜드 키위의 원조는 중국산 야생 다래이니 한국산 다래도 키위의 친척이다.

 

한국산 다래를 개량한 키위는 뉴질랜드 시장에서 ‘베이비 키위’란 이름으로 팔리고 있었다.

 

바네트 연구원은 키위 속에 빨간 테가 들어 있는 키위, 아예 속이 빨간 키위, 손가락 모양으로 길쭉한 키위, 매운맛 나는 키위 등도 보여줬다. 그는 “맛, 껍질 색깔, 과육 색깔, 저장의 편리성, 생산성 등에 따라 키위의 종자를 분류하고 개량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호트연구소는 연구원만 500여명인 세계 최대의 원예작물연구소다. 호트연구소는 뉴질랜드 정부 소유로 전체 수입의 60%는 정부에서 지원받지만 나머지 40%는 민간기업과 상업적인 계약을 맺고 수입을 얻는다. 뉴질랜드 키위 마케팅 회사인 제스프리는 호트연구소의 중요한 고객이다.

 

2004년 제스프리와 호트연구소는 호트연구소의 키위 연구 부문이 제스프리의 연구개발(R&D)을 맡는다는 협약을 맺었다. 또 제스프리는 호트연구소가 개발한 ‘골드키위’(개발명 호트16A)의 묘목과 과일에 대한 독점적인 사용권을 갖기로 했다.

 

제스프리의 R&D 부서는 원예학자 1명을 포함해 4명에 불과하지만, 호트연구소의 키위 연구 인력 100여명을 활용해서 세계 키위 산업에서 기술 주도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세인 맥스(Shane Max) 호트리서치 기술 이전 매니저는 “제스프리와 연구소 팀이 수시로 만나 정보를 교환하고 있다”고 말했다.

 

테푸키의 호트연구소는 40ha(12만여평)의 널찍한 과수원을 끼고 있었다. 앨런 실(Alan Seal) 호트리서치 키위 육종팀장은 “유전자 조작이 아니라 교배, 가지 접붙이기 등을 통해서 품종을 개량하고 있다”고 말했다. 뉴질랜드에선 유전자 조작이 법으로 금지돼 있다.

 

때문에 연구소에는 과수원이 필수적이다. 연구소 본관 바로 앞에는 키위를 포장하는 소규모 팩하우스(Packhouse)도 있었다. 연구소 부설 과수원에서 생산되는 키위도 포장을 해서 시장에 내다 파는 것이다.

 

키위는 씨를 심어 꽃이 피기까지 3년이 걸린다. 2~3년 수확하기 때문에 5~6년을 한 세대로 본다. 골드키위의 경우 1992년 한 그루로 시작해서 2001년 확산시키기까지 10년, 즉 두 세대가 걸렸다.

 

과수원에서는 키위 종자뿐 아니라 키위 재배 방법도 연구한다. 바네트 연구원은 통상적인 과수원의 밀도보다 10배나 집적해서 심은 블록도 보여줬다. 그는 “키위를 밀집해 심어도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지 연구 중”이라고 말했다.

 

또 키위 암나무와 수나무의 비율도 관심사다. 뉴질랜드 키위 농가는 암나무와 수나무를 6 대 1로 심는 제스프리의 표준 농법을 따르고 있다. 바네트 연구원은 “암·수나무의 비율이 6 대 1이나 5 대 1이 됐을 때 열매의 크기가 적당하고 가장 경제성이 좋다”고 말했다.

 


농민의 요구사항도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그린키위 열매 끝의 뾰족한 부분이 운반 과정에서 다른 키위 열매를 상하게 할 우려가 제기되자 끝이 둥근 모양의 그린키위로 개량하고 있다.

 

연구결과는 제스프리의 웹사이트와 소식지를 통해서 농가에 전달된다. 제스프리는 공통적인 내용을 표준 농법의 형태로 정리해서 농가에 보급하고 있다. 예컨대 제스프리의 농가는 9㎡를 기준으로 자연 상태에서 1600여개의 키위가 열리는데, 크기와 당도를 유지하기 위해 400여개를 솎아내고 그 수를 1200여개로 유지하도록 하고 있다.

 

연구소는 소비자의 요구도 반영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가장 단적인 예가 골드키위다. 1980~1990년대 연구소가 시장 조사를 한 결과, 소비자들이 그린키위와는 완전히 다른 키위를 요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구체적으론 그린키위보다는 단맛이 강하면서 열대 과일 정취가 나는 제품을 원했다. 때문에 과육 색깔이 노란색으로 완전히 새로운 느낌을 주는 골드키위를 개발한 것이다. 

 

이밖에도 최근까지 연구소가 개발에 노력을 기울였던 것은 속이 붉은 색을 띠는 키위였다. 일부 제품이 상용화돼서 ‘레드 키위’란 이름으로 일본 등에 수출 중이다.

 

실 팀장은 “앞으론 그린키위의 색은 유지하면서 단맛은 높은 종자에 집중할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키위 껍질 색도 녹색에서 붉은색으로 바뀔 수 있는지 연구 중이다. 실 팀장은 “새로운 키위의 개발에는 20~25년이 걸린다”며 “25년 후의 소비자 취향을 예측해서 연구하는 게 가장 어려운 작업”이라고 말했다.

 

 

 

뉴질랜드 키위는 마케팅과 연구개발이 키웠다

[주간조선 2006-04-25 10:53]

 


100년 전 중국의 씨앗 가져다 종자 개량해‘키위’로 이름 붙여
농민이 주주인 회사‘제스프리’설립... 골드키위 등 세계적 히트

지난 3월 30일 뉴질랜드 최대 도시 오클랜드에서 버스를 타고 4시간을 달려 ‘세계 키위의 수도’라고 불리는 테푸키(Te Puke)에 도착했다. 오클랜드는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로 12시간이 걸렸다. 테푸키는 인구 7000여명의 소도시지만 세계 키위 산업의 틀이 만들어진 곳이다.

 

키위는 노란색 껍질에 털이 숭숭 나 있는 흉측한 과일이어서 맛을 보기 전까지는 쉽게 손이 가지 않는다. 키위 판매업자조차 “겉모양만 보면 감자와 비슷해서 사과나 오렌지에 비해 경쟁력이 없다”고 인정할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푸키의 과수원 업자들은 1930년대에 키위를 상업적인 과일로 재배하기 시작했다. 1953년엔 테푸키에서 생산된 키위를 배로 5주일이나 걸리는 영국에 최초로 수출했다.

 

테푸키는 키위 산업이 탄생한 곳일 뿐 아니라 현재 뉴질랜드 키위 생산의 중심지다. 테푸키의 키위 과수원 면적은 서울 여의도의 4.8배인 4100여ha로, 뉴질랜드 키위 재배면적의 38%를 차지하고 있다.

 

테푸키에서 승용차로 30분을 달리면 뉴질랜드 최대의 수출항인 타우랑아(Tauranga)다. 인구 5만8000여명인 타우랑아에는 뉴질랜드산 키위의 마케팅 회사인 ‘제스프리(Zespri)’ 본사가 위치하고 있다. 제스프리는 1997년 창립됐으며 주주는 100% 농민이다.

 

1층짜리 본사 건물엔 100여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다. 미국·일본·한국 등 11개국에 퍼져 있는 지사 인원을 합쳐도 200명이 채 안 된다. 연 매출액은 10억뉴질랜드달러(약 6000억원)이다.

 

제스프리는 세계적인 과일 마케팅 회사인 돌(Dole, 매출 5조원), 치키타(Chiquita, 4조원), 델몬트(Del monte, 3조원) 등과 비교하면 회사 규모는 작지만 키위에 있어서만은 세계시장 점유율이 20%로 독보적이다. 남반구의 과일 시즌인 5~10월엔 제스프리 키위의 시장점유율이 70%까지 상승한다.

 

타우랑아와 테푸키를 중심으로 한 베이 오브 플렌티(Bay of Plenty) 지역은 뉴질랜드의 효자 수출품인 키위의 80%가 생산되는 지역이다. 이 지역은 미네랄이 풍부한 화산흙으로 뒤덮여 있고 일조량이 많으면서도 밤에는 선선해 키위 생산의 최적지역이다.

 

키위는 뉴질랜드 과일·채소 수출의 39%를 차지하고 있다. 뉴질랜드는 수출품의 절반이 농축산물이다.

 

베이 오브 플렌티는 한국으로 따지면 자동차 공장과 조선소가 몰려 있는 수출기지인 울산과 같은 곳이다. 이 지역에는 키위 과수원 외에도 수출용 키위를 포장하는 팩하우스(Packhouse)와 냉장 보관하는 쿨스토어(Coolstore)가 몰려 있어 제조업 공단과 비슷한 농업 산업단지를 형성하고 있다.

 

뉴질랜드 키위의 91%는 타우랑아 항구를 거쳐 세계 60여개국으로 수출되고 있다. 피터 럭스턴 제스프리 글로벌마케팅 매니저는 “베이 오브 플렌티 지역은 키위를 키우는 데 최적의 자연 조건을 갖추고 있어 경쟁력 있는 상품이 생산되고 있다”며 “어린이 비만과 같은 건강 문제가 중요시되면서 키위는 앞으로 과일뿐만 아니라 스낵이나 음료 등 먹거리 시장을 두고 경쟁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뉴질랜드 키위 산업의 발전사는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 한국의 제조업 발달사에 비견할 만하다. 많은 사람이 키위를 뉴질랜드 고유의 과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중국이 원산지다. 100년 전만 해도 뉴질랜드산 키위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뉴질랜드 농민은 중국에서 가져온 야생 다래를 팔기 쉬운 상품으로 개량한 후에 키위프루트(Kiwifruit)란 이름을 붙이고 주력 수출품으로 개발했다. 마치 한국의 휴대전화 산업이 미국의 퀄컴사가 개발한 휴대전화 신호 전송 방식인 CDMA(코드분할다중접속)를 채택, 세계 최초로 상용화한 뒤에 한국이 CDMA 종주국임을 자처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1904년 중국 양쯔강변의 도시인 이창(宜昌)을 방문했던 뉴질랜드 여교사 이사벨 프레이저는 중국 야생 다래의 씨를 갖고 귀국했다. 중국산 다래나무는 포도나무와 같이 덩굴로 자라 초기엔 그늘을 만드는 정원수로 주로 쓰였다.

 

열매는 차이니스 구스베리(Chinese Gooseberry)라고 불렸다. 중국산 다래 종자는 1920년대에 원예학자인 헤이워드 라이트 등의 손을 거쳐 열매 크기가 굵어지고 당도도 높게 개량됐다. 현재 그린키위라고 불리는 헤이워드 키위 종자가 탄생했다.

 

키위는 1930년대 뉴질랜드 국내시장에 선보였고, 1950년대에 수출길에 나섰다. 세계적으로 수요가 증가하면서 뉴질랜드 정부는 2차 세계대전 직후 참전병사의 사회복귀 프로그램으로 과수원을 권장했고, 자연 조건이 좋은 베이 오브 플렌티 지역에 키위 재배가 급증하게 됐다.

 

뉴질랜드에서 재배한 키위는 북반구에서 과일이 나지 않는 시기에 공급이 가능했기 때문에 큰 돈벌이가 됐다. 또 장거리를 냉장해서 싣고 가도 물러지지 않고 맛이 더 좋아지는 현상이 발견돼 구대륙과 멀리 떨어진 뉴질랜드로선 수출에 유리했다. 딴 후에 익혀서 먹는 후숙(後熟) 과일이기 때문이었다.

 

키위의 겉모양이 호감을 주지 않기 때문에 수출 초기부터 절반을 잘라서 속을 보여주고 맛과 영양이 풍부하다는 걸 강조하는 마케팅 전략을 펼쳤다. 1959년 일부 뉴질랜드 수출상은 차이니스 구스베리라고 불리던 키위에 ‘키위프루트’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붙였다.

 

 ‘뉴질랜드 과일’이라는 뜻으로 처음엔 신비한 느낌을 주고 중국에 대한 미국인의 거부감을 무마시키기 위한 브랜드 이름으로 만들었지만 이제는 보통명사처럼 쓰이게 됐다.

 

 


뉴질랜드 수출상들은 1960년대에 그린 키위 나무의 묘목 수출도 병행했다. 묘목은 미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남아프리카, 인도, 남미, 모로코, 이스라엘 등으로 팔려나갔다. 키위가 돈 되는 작물이란 인식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한국도 1970년대 후반 뉴질랜드에서 묘목을 수입한 후 개량해서 참다래(양다래)라는 이름으로 키우고 있다.

 

뉴질랜드인은 북반구에 재배 면적이 늘어나면 시장이 확장될 것을 기대했고, 다른 나라들이 뉴질랜드의 키위 재배나 저장 기술을 따라오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1960~1970년대 세계 경제의 황금기를 거치면서 키위의 수요는 급증했고, 뉴질랜드산 키위의 공급도 늘었다. 1976년 100만상자째 수출을 축하하는 기념식이 테푸키에서 열렸다. 1978년에는 200만상자 수출을 달성했다.

 

항상 좋은 소식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영국에 60% 이상의 수출을 의존했던 뉴질랜드 경제는 2차 세계대전 이후 국력이 쇠락해진 영국의 침체에 따라 경제가 동반 하락세를 보이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1970년대 두 차례의 오일쇼크 이후 세계 경제가 위축되면서 농산물 가격이 떨어졌다.

 

 1950년대에 OECD국가 중 5위권에 들었던 뉴질랜드의 경제력은 1980년 19위로 하락했다. 수출을 겨냥한 키위의 생산은 급증했지만 이익은 생각만큼 늘지 않았다. 세계 경제는 위축되는데도 공급은 늘어나면서 가격은 떨어지고 농민에게 돌아가는 이익은 하락했다.

 

키위 수출 물량은 1982년 470만상자에서 1987년 4600만상자로 10배 가까이 늘었다.

뉴질랜드 키위의 공급을 조절하기 위해 농민들은 1988년 7개의 수출업체가 경쟁하던 것을 하나의 수출 창구로 정리했다.

 

단일 수출 창구로 뉴질랜드 키위프루츠 마케팅 보드(New Zealand Kiwifruits Marketing Board·NZKMB)가 창설됐다. 단일한 수출 창구를 만드는 방안은 키위 농가의 투표에서 80% 이상의 찬성표를 얻었다. 내부경쟁을 제한한 긴급 처방에도 불구하고 뉴질랜드 키위 산업은 해외의 경쟁격화로 인해 1992년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된다.

 

주요 타깃 시장이었던 유럽에 이탈리아, 프랑스, 그리스 등에서 생산된 키위가 과잉 공급되면서 가격이 떨어졌다. 키위를 세계 최초로 상업화한 뉴질랜드 농민은 품질로만 따지면 세계 최고라고 자부했지만 결국 뉴질랜드는 ‘여러 키위 생산국 중의 하나’에 불과했다. 칠레, 프랑스, 이탈리아, 중국 등의 키위 생산이 오히려 뉴질랜드를 넘어섰다.

 

1992년 수출액은 전년의 7억4000만뉴질랜드달러에서 5억3100만뉴질랜드달러로 급감했다. 산업 전체로 7400만뉴질랜드달러의 손해도 봤다. 뉴질랜드 정부는 이미 1987년부터 농업 보조금 정책을 포기했기 때문에 정부로부터의 도움은 기대할 수 없었다.

 

농민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키위 마케팅 보드는 우선 재배 면적을 줄이도록 농가를 설득하는 한편 은행에 농민의 부채 상환을 유예해달라는 요청을 했다. 약 20%의 농가가 키위 재배를 포기했다.

 

수년간의 구조조정을 거친 후에 1997년 뉴질랜드 키위만을 마케팅하는 제스프리란 회사가 출범하게 됐다. 제스프리는 수출 단일창구 역할을 하면서 마케팅과 연구개발(R&D)을 책임지는 걸 목적으로 했다. 마케팅 회사 설립에 대한 농가 투표에서는 90%의 찬성을 보였다.

 

뉴질랜드 농민이 친(親)소비자 마케팅으로 위기를 극복하겠다는 전략을 승인한 것이다. 제스프리는 2000년 2500여농가가 참여해 농민이 100% 주주인 주식회사로 전환했다. 제스프리 이사회는 농가 대표가 다수지만 최소 3명의 사외이사를 두고 있고 회사 운영에는 마케팅 전문가들이 합류했다.

 

키위는 겉모양이 못생겼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속살을 보여주는 광고와 시식행사가 주요한 마케팅 수단이었다. 제스프리는 출범 이후 기존 마케팅을 강화하면서 브랜드 마케팅을 새로 도입했다. 키위 품질을 공산품처럼 균일하게 유지하면서 ‘제스프리’라는 상표를 붙여 다른 국가의 키위와 차별화하는 게 핵심이다.

 

북반구에서 생산되는 키위도 제스프리의 품질과 같다면 ‘제스프리’ 상표를 붙여 공급했다. 5~10월의 시즌 이외에도 ‘12개월 제스프리’라는 브랜드를 소비자에게 노출시키자는 전략이었다.

 

제스프리는 골드키위라는 신상품을 시장에 내놨다. 제스프리는 연구·개발에 있어 아웃소싱 전략을 채택했다. 골드키위는 14년 전만 해도 세상에 없던 과일이다. 골드 키위는 1992년 테푸키에 있는 세계 최대의 원예작물연구소인 호트연구소에서 태어났다.

 

호트연구소는 그린키위의 묘목 수출이 부메랑으로 변해 뉴질랜드 키위 산업의 위기를 불러왔던 경험을 되살려 국제특허를 받았다. 제스프리는 호트연구소가 가진 골드키위의 원천기술에 대해 독점 사용권 계약을 맺었다. 제스프리는 매년 수백만 뉴질랜드달러의 기술 사용료를 호트연구소에 준다.

 

마치 휴대전화 신호 전송방식인 CDMA(코드분할다중접속)의 원천기술은 미국의 퀄컴사가 가지고 있고, 삼성전자 등 한국의 휴대전화 제조업체들은 기술 사용료를 내는 것과 마찬가지다.

 

1998년 제스프리의 세계 네트워크를 통해 골드키위는 일본으로 첫 수출길에 나섰다. 그 후 골드키위는 그린키위 시장을 침식하지 않으면서 전체 키위 시장을 확대하는 블루오션(경쟁이 없는 새로운 시장)을 열었다. 골드키위는 시장에 선보인 지 7년 만에 세계 60여개국에서 연간 1억4000만뉴질랜드달러(840여억원)어치가 팔릴 정도로 인기 있는 과일이 됐다.

 

브랜드 마케팅과 골드키위의 성과를 바탕으로 제스프리는 6년 연속 매출 신장을 기록했다. 키위의 뉴질랜드 도래 100주년을 맞았던 2004년엔 사상 처음으로 10억뉴질랜드달러의 매출을 달성했고, 그 이후 성장 추세를 이어가고 있다.

/ 베이 오브 플렌티(뉴질랜드)= 글·사진 방현철 주간조선 기자(banghc@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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